Friday, July 22, 2011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아 헤메다가...

우희종 교수님 논문을 3일동안 찾았다. 집, 연구소를 샅샅이 뒤져도 없다.
이제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드려야 한다.

복잡계 이론으로 본 생명과 깨달음의 구조 View of complexity theory on religious experience of full awakening, 우희종, 한국정신과학회지 제11권 제2호(2007년 12월, 통권 제 22호)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Jungshin Science. Vol.11 No.2. 2007. pp.45-60

2008년에도 읽었고, 얼마전에도 다시 꺼내 읽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몇 페이지의 논문에 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가 없다.
은영이가 그당시 그 논문을 잘 독해 못하는 나에게 법사님 한 분을 소개시켜 주어 그 분의 해독을 열심히 받아 적은 논문이었는데
그당시에도 이해 못하고 얼마전 읽었을 때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 지금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꺼라 다시 찾았는데...
없다! 잃어버렸다!

우희종 교수님께 연락하기 위해 검색하다 찾은 불러그에서 이런 글귀를 발견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미를 묻는 행위는 마치 지금 비 오는 바닷가에서 빗줄기와 바람을 피해 몸의 방향을 바꿔가며 웅크리고 떨고 있는 갈매기에게 너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 갈매기는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 갈 것이고, 또 다른 갈매기가 태어나 그 자리를 대신 할 뿐.

자신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끝은 그 출발점이 된 의미를 내려놓음으로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때 마무리 된다. 다시 말하면 마치 갈매기가 태어나 열심히 살다가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죽어 가듯이 사람도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게 될 때 스스로 부여해서 그토록 자신을 얽매고 가두고 있던 의미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휴휴재-이곳 너머 이곳 으로 부터

Tuesday, July 12, 2011

삶과 죽음을 대치할 만한 고통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틀을 꼬박 쳐박고 있었다.

월요일이 시작되어 다시 일터로 나왔다.

또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늘 그렇듯이 또 시작한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집에 오는 동갑의 지인, 친구 아이의 베이비시터이기도 한 그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했다고

빗속에서 운전을 하면서 받은 전화. 믿기지 않았다.

얼마전까지도 나도 본 그녀인데...피아노를 전공하고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일이 그다지 필요치 않는데, 아이가 예뻐서, 아이에 대한 의무감에

계속 친구의 아이를 돌 본 그녀. 가사일을 잘안해준다는 친구의 투정에도 나는 그녀의 낙지볶음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참 인생이 이렇게도 허무하구나. 어제 퇴근하고 오늘 아침 전화를 받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는데

그녀의 남편으로 부터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전화를 한 통 받았다고 친구는 전한다.

그렇게 치열하게 분노하거나 뺏길까 두려워하거나 그렇게 혼자만이 일한다고 투정할 것도 없다.

죽음 앞에서는 다 부질없는 것임을...

다시 시작하자.

이왕이면 힘차게, 열심히, 순간 순간 지금 현재에 집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