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Cerith Wyn Evans
I sent e-mail for my classmates of Expanding Interactive Video.
Hi. Everyone.
I wanna introduce Cerith Wyn Evans.
He is a British artist. He firsly made several experimental film and music video like Scott. Since 1990, he is an installation artist. Specially he has made chandelier pieces.
This is one of his exhibition at Kunsthouse Graz
We show very nice a neon architecture of Kunsthouse Graz building(BIX) today our class.
I just confused BIX who made it. You guys know that this one made a company's architects.
But they got inspiration from Cerith Wyn Evans's work.
Enjoy seeing work!
K.
contents 2007.4. Wolrd topic | 덧없는 존재의 아름다움
박진아●미술사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굳건히 자리잡은 세리스 윈 에반스는 “접근가능함이라는 관념이 싫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작품세계는 일반 관객은 물론 미술 평론가들조차 손쉬운 범주화나 정의 내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치 실마리의 틈도 내주지 않는 듯하다.
이를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작년 9월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개최된 〈빈센트 반 고흐 유럽 현대미술 대상〉 행사의 심사위원들은 수상자 후보로 지명된 윈 에반스에 대해 “우아함 뒤에 가려진 단숨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급진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을 하는 작가라며 두루뭉실한 말로 정리했다. 그런가 하면, 보스턴 화인 아츠 미술관의 큐레이터 윌리엄 스토버(William Stover)는 2004년에 열린 세리스 윈 에반스의 개인전에 기하여 쓴 글에서, “윈 에반스 작품의 원천은 영화부터 문학과 철학 분야에 두루 걸쳐 추출된 것으로서, 작가가 스스로 이름한 이른바 ‘가능한 의미들의 촉매제 혹은 저수지’를 창조하여 관객에게 다양한 여정을 선사할 것”이라고 묘사했다. 종잡기 어려운 이 같은 운(云)은 결국 윈 에반스의 작품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려움을 넌지시 시인한 것인 동시에 관객이 알아서 경험하고 알아서 해석해달라는 도전 겸 부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현대미술 평론계에서 즐겨 사용되는 신비와 모호의 화법도 세리스 윈 에반스의 작품에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데 한 팔 거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막스주의 계열 미술평론가인 줄리언 스탈라브라스(Julian Stalla- brass)는 그의 저서 《아트 인코퍼레이티드》(2004년)에서,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세리스 윈 에반스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품을 불가해한 신비의 뭉치인 것처럼 포장하는 현대미술 평론의 관행을 지적하면서 “이는 저급한 대중문화와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고 싶어하는 순수 미술계의 차별화 전략일 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심지어 자유주의 편향의 《인디펜던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에 냉소적인 영국의 일부 신문들은 전시회 리뷰 기사에서 지나치게 내면관조적(inward-looking)이고 고상한 척하는 윈 에반스의 스타일은 조용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할망정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그러나 세리스 윈 에반스가 연출하는 특유의 모호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신비하고 숭고한 분위기는 그의 핵심적인 창조 전략이며 무기다. 그가 자아내는 근접불능의 난해함을 잠시 옆으로 밀어둔 채 감히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해 보면, 결국 정치, 사회, 젠더(특히 동성애주의), 휴머니즘, 영혼과 감성, 언어와 시지각 같은 주제들을 포괄하는 정체성의 정치학(identity politics)이라는 현대미술적 쟁점에 대한 개인적인 논평과 다름없다. 1984년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를 갓 졸업한 26세의 젊은 윈 에반스가 런던 피카딜리 극장 주변의 캬바레와 나이트클럽을 드나들며 단편 영화 발표와 시 낭송회에 몰두했던 1980년대의 런던(같은 시기 뉴욕 언더그라운드 클럽 문화와 유사하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 문화로 잔뜩 흡수되고 있었다. 퍼포먼스 작가 겸 패션디자이너 리 바워리(Leigh Bowery), 영화감독 데릭 저먼(Derek Jarman)과 존 메이버리(John Maybury), 팝 가수 보이 조지(Boy George)와 스티브 스트레인지(Steve Strange) 등과 어울리며 친분을 쌓고 실험주의, 페미니즘, 동성애 이론, 다문화주의 같은 비판문화이론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이 극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대처 정권 속에서 그나마 그의 숨통을 터 주었다.
그의 작품 속에 줄기차게 흐르는 골자는 엘리트주의적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가차없는 엄격성과 매정함에서 비롯된 작가 내면의 자책감과 반성의식에 대한 표현이라고 일부 평론가들은 지적한다. 예컨대, 그가 작품에 즐겨 차용한 바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외에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감독의 영화 내러티브, 브라이언 가이즌(Brion Gysin)과 윌리엄 버로스(William S. Burroughs)의 실험주의 문학, 기 드보르(Guy Debord)의 급진적 사회이론은 전문지식이나 고등교육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른바 ‘고급 문화’의 산물이다. 반면에 그가 설치물에 자주 활용하는 컴퓨터는 대중 매체의 은유물로서,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감상 상대가 지성인이든 대중이든 차별하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민주적’인 기계를 대변한다.
예컨대, 그의 대표작인 〈자연순리에 대한 역행(Against Nature)〉(2003)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결합체로 꼽힌다.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귀족이자 극단적인 탐미주의자였던 J.K. 위즈망(J.K. Huysmans)이 쓴 동명의 책(1884년 출간)에서 발췌한 텍스트 일부를 컴퓨터에 연결시켜 모스 부호로 바꾼 후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인 리비오 카스틸리오니와 잔프란코 프라티니가 디자인한 투명 플라스틱 튜브 모양의 조명 명품 보알룸 램프(Boalum Lamp, 아르테미데 사 생산, 1969)를 달아 깜빡거리도록 제작한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론가 얀 페르뵈르트(Jan Verwoert)의 분석은 다분히 민주적이다. 그에 따르면 위즈망의 탐미주의 텍스트와 보알룸 명품 램프로 대변되는 고급문화와 컴퓨터로 대변되는 민주적인 기계를 한 작품 안에 나란히 연결하여 추상적인 관념을 컴퓨터라는 민주적 매체로 전환시킨 윈 에반스는 이렇게 ‘번역된’ 메시지(주로 모스 신호 음향효과나 음악)를 관객과 소통하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모스 부호는 근 한 세기 전에 사용된 한물간 통신언어라는 점에서 과거, 기억, 구물(舊物)에 대한 노스탤지아의 은유이며 컴퓨터는 대중 매체의 상징에 불과하다. 조명에 모스 부호라는 특수 문자/소리 언어와 컴퓨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언뜻 윈 에반스는 테크노 지향적인 미술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지만 실은 테크놀러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또 그는 작품 제작을 디자이너들이나 전문 기술자들에게 외주하는 대리 제작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 디자이너들을 시켜 디자인한 후 무라노 유리 공방에서 제작해 온 샹들리에를 작품화한 〈주파주 교정과 센시토메트리(Calibration and Sensitometry)〉(1987/2006)와 〈일기: 세상을 개선하는 방법(Diary: How to Improve the World(You will only make is worse)〉(2003)은 존 케이지의 글 〈M. Writings ’76〜’72〉에서 발췌한 텍스트를 컴퓨터를 사용해 모스 코드로 전환한 후 빛이 모스 신호를 치듯 깜빡거리도록 만든 조명설치 연작들이다.
윈 에반스의 궁극적인 관심사이자 영원한 영감의 원천은 텍스트다. 언어와 시간과 지각의 현상학이라는 주제를 일관적으로 다루게 되기까지 그는 어린시절부터 알랭 로브-그리예의 누보로망 텍스트와 문예이론을 흠모하며 통독했다고 한다. 누보로망 소설은 서부 웨일스의 석탄과 철강산업 도시 라넬리에서 자란 감수성 예민한 유년의 윈 에반스에게 환상의 날개를 달아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시간, 장소, 인물 성격의 묘사를 위주로 한 전통적인 소설과는 반대로 화자의 개인적인 시점을 위주로 한 한결 모호한 분위기의 누벨 로망식 서술법은 ‘열린 결말’과 ‘자유로운 상상’을 허용했다.
그렇다면 세리스 윈 에반스에게 이미지는 무엇을 뜻할까? 그에게 이미지로 완성되는 시각 미술 작업이란 이야기의 종결을 뜻하며 따라서 곧 임박할 사멸에 대한 은유이다. 윈 에반스가 알랭 로브-그리예와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현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공동 관장)와 나눈 3자 대담에서 밝힌 바 있듯이, 이미지 또는 그림(영상 혹은 비영상)은 ‘결말의 종결’을 뜻하며 이는 곧 그것이 해피엔딩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독자의 ‘실망’을 뜻한다. 롤랑 바르트가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글에서도 썼듯이 결말의 종결이라 함은 이야기가 종착지에 다다르고 여러 무한한 상상의 결론이 모조리 닫힘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윈 에반스가 기호학에서 빌려온 텍스트 상호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 개념을 일관된 화두로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의 하늘은 종이처럼 얇다(The Sky is thin as Paper here)〉(2004)는 윌리엄 버로스의 소설 〈The Place of Dead Roads〉에 등장하는 구절을 따와 제목을 붙이고 일본 신사(神社) 예식에서 따온 이미지들을 슬라이드 프로젝션으로 만들었다. 겹겹이 겹쳐져 보이는 일본 남성들의 사진 이미지들을 통해서 작가는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hypertext)를 연상시키는 내러티브를 재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가 하면 〈드리머신(Dreamachine)〉 시리즈는 시인 겸 화가이자 버로스의 반려자였던 브라이언 가이즌에 대한 경의를 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이즌이 1960년대에 만들었던 드리머신을 재구성한 이 작품은 서서히 도는 긴 원통에 새겨진 패턴 사이사이로 은은한 전구 빛이 스며나오도록 제작되었다. 한참 바라보고 있자면 관객은 어느덧 최면 상태에 빠지는 듯한 묘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1960년대 풍의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와 가이즌의 위대한 문학정신이 남기고 간 마력의 기억을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만물의 덧없음을 빛으로 읊조리는 음유시인
덧없음(ephemerality)과 이율배반(paradox)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그의 대표작 〈Inverse, Reverse, Perverse〉(1996)에 잘 나타나 있다. 자크 라캉의 ‘거울 자아 단계’ 이론을 재연한 듯한 이 작품에서 관객은 표면이 오목하게 들어간 요면 거울 속에 반영된 위아래가 뒤집히고 형상이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작가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시각적 인지(perception)가 얼마나 망가지기 쉽고 상대적인 것인지를 생각해보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뫼비우스 띠〉(1997)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연속과 반복의 수학적인 형태를 빌려서 인간의 감성은 기억 혹은 추억에 의해서 끝없이 반복되고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한 번 터지면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불꽃은 윈 에반스가 즐겨 사용하는 또다른 덧없음의 은유다. 〈In Girum Imus Nocte Et Consumimur Igni〉(1997)는 기 드보르의 최후작인 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온 제목으로서 “우리는 밤새 돌고 돌다가 불 속으로 탕진해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돌고 도는 생과 사의 순환원리를 명상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앞에서부터 읽든 뒤에서부터 읽든 동일한 라틴어 팔린드롬(palindrome)의 언어적 유희성을 십분 활용하기 위하여 플라스틱 원통형 위에 네온관으로 문구를 부착시켰다.
영화 선배인 데릭 저먼의 영향 덕택에 세리스 윈 에반스의 설치작은 빛을 흥건하게 사용한 것들이 대종을 이룬다. 네온 조명은 초고속으로 대기를 여행하는 빛의 특성을 반영해주는 안성맞춤의 재료일 뿐만 아니라 현대인에게 익숙한 24시간 잠들지 않는 도시 공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네온 조명으로 빛나는 텍스트 구절은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언급을 하는 듯 보이지만 작가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나 해석의 여지를 노출시키기를 꺼린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깜빡대는 네온 빛과 모호함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언뜻 아름다워 보이는 그의 작품에는 어김없이 세상만사의 일시성과 덧없음에 대한 멜랑콜리가 감돈다. 최근 오스트리아 쿤스트하우스 그라츠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거품 방울을 파는 행상인(Bubble Peddler)〉이라고 이름한 연유도 전세계를 여행하며 미술 작품을 선보이고 내다 파는 작가 자신을 한낱 비누거품을 방울방울 불어서 생계를 잇는 행상인에 비유한 시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품방울은 갖가지 형상으로 오색찬연하게 공중을 날지만 순식간에 터져 사라지고 만다. 일본의 가부키에서 기요모토(淸元) 음악에 맞춰 추는 격렬한 춤에서 빌린 거품방울을 파는 행상인 모티프는 한낱 덧없는 존재의 무상함을 뜻한다.
대중 매체가 현대인의 가장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구석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요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경계는 점점 자취를 잃고 있다. 그에 대한 논평으로 윈 에반스는 이번 그라츠의 전시를 위해 특수 주문 제작된 작품 〈채색된 중국 전등(Coloured Chinese Lanterns...)〉(2007)에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이 무작위로 뒤섞인 현실을 조용히 꼬집는다.
제아무리 희한하고 별의별 모양의 거품을 불어낸다 한들, 거품방울의 생명은 몇 초를 넘기지 못하고 터져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듯이 글로벌시대의 미술계를 주름잡으며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작가 자신이 그것과 뭐가 다르다 하겠는가? 세리스 윈 에반스는 깨지기 쉬운 생명과 마찬가지로 세속의 모든 성공과 명망조차 무상(無常)한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 wolganmisool
Hi. Everyone.
I wanna introduce Cerith Wyn Evans.
He is a British artist. He firsly made several experimental film and music video like Scott. Since 1990, he is an installation artist. Specially he has made chandelier pieces.
This is one of his exhibition at Kunsthouse Graz
We show very nice a neon architecture of Kunsthouse Graz building(BIX) today our class.
I just confused BIX who made it. You guys know that this one made a company's architects.
But they got inspiration from Cerith Wyn Evans's work.
Enjoy seeing work!
K.
contents 2007.4. Wolrd topic | 덧없는 존재의 아름다움
박진아●미술사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굳건히 자리잡은 세리스 윈 에반스는 “접근가능함이라는 관념이 싫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작품세계는 일반 관객은 물론 미술 평론가들조차 손쉬운 범주화나 정의 내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치 실마리의 틈도 내주지 않는 듯하다.
이를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작년 9월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개최된 〈빈센트 반 고흐 유럽 현대미술 대상〉 행사의 심사위원들은 수상자 후보로 지명된 윈 에반스에 대해 “우아함 뒤에 가려진 단숨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급진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을 하는 작가라며 두루뭉실한 말로 정리했다. 그런가 하면, 보스턴 화인 아츠 미술관의 큐레이터 윌리엄 스토버(William Stover)는 2004년에 열린 세리스 윈 에반스의 개인전에 기하여 쓴 글에서, “윈 에반스 작품의 원천은 영화부터 문학과 철학 분야에 두루 걸쳐 추출된 것으로서, 작가가 스스로 이름한 이른바 ‘가능한 의미들의 촉매제 혹은 저수지’를 창조하여 관객에게 다양한 여정을 선사할 것”이라고 묘사했다. 종잡기 어려운 이 같은 운(云)은 결국 윈 에반스의 작품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려움을 넌지시 시인한 것인 동시에 관객이 알아서 경험하고 알아서 해석해달라는 도전 겸 부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현대미술 평론계에서 즐겨 사용되는 신비와 모호의 화법도 세리스 윈 에반스의 작품에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데 한 팔 거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막스주의 계열 미술평론가인 줄리언 스탈라브라스(Julian Stalla- brass)는 그의 저서 《아트 인코퍼레이티드》(2004년)에서,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세리스 윈 에반스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품을 불가해한 신비의 뭉치인 것처럼 포장하는 현대미술 평론의 관행을 지적하면서 “이는 저급한 대중문화와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고 싶어하는 순수 미술계의 차별화 전략일 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심지어 자유주의 편향의 《인디펜던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에 냉소적인 영국의 일부 신문들은 전시회 리뷰 기사에서 지나치게 내면관조적(inward-looking)이고 고상한 척하는 윈 에반스의 스타일은 조용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할망정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그러나 세리스 윈 에반스가 연출하는 특유의 모호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신비하고 숭고한 분위기는 그의 핵심적인 창조 전략이며 무기다. 그가 자아내는 근접불능의 난해함을 잠시 옆으로 밀어둔 채 감히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해 보면, 결국 정치, 사회, 젠더(특히 동성애주의), 휴머니즘, 영혼과 감성, 언어와 시지각 같은 주제들을 포괄하는 정체성의 정치학(identity politics)이라는 현대미술적 쟁점에 대한 개인적인 논평과 다름없다. 1984년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를 갓 졸업한 26세의 젊은 윈 에반스가 런던 피카딜리 극장 주변의 캬바레와 나이트클럽을 드나들며 단편 영화 발표와 시 낭송회에 몰두했던 1980년대의 런던(같은 시기 뉴욕 언더그라운드 클럽 문화와 유사하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 문화로 잔뜩 흡수되고 있었다. 퍼포먼스 작가 겸 패션디자이너 리 바워리(Leigh Bowery), 영화감독 데릭 저먼(Derek Jarman)과 존 메이버리(John Maybury), 팝 가수 보이 조지(Boy George)와 스티브 스트레인지(Steve Strange) 등과 어울리며 친분을 쌓고 실험주의, 페미니즘, 동성애 이론, 다문화주의 같은 비판문화이론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이 극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대처 정권 속에서 그나마 그의 숨통을 터 주었다.
그의 작품 속에 줄기차게 흐르는 골자는 엘리트주의적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가차없는 엄격성과 매정함에서 비롯된 작가 내면의 자책감과 반성의식에 대한 표현이라고 일부 평론가들은 지적한다. 예컨대, 그가 작품에 즐겨 차용한 바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외에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감독의 영화 내러티브, 브라이언 가이즌(Brion Gysin)과 윌리엄 버로스(William S. Burroughs)의 실험주의 문학, 기 드보르(Guy Debord)의 급진적 사회이론은 전문지식이나 고등교육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른바 ‘고급 문화’의 산물이다. 반면에 그가 설치물에 자주 활용하는 컴퓨터는 대중 매체의 은유물로서,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감상 상대가 지성인이든 대중이든 차별하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민주적’인 기계를 대변한다.
예컨대, 그의 대표작인 〈자연순리에 대한 역행(Against Nature)〉(2003)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결합체로 꼽힌다.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귀족이자 극단적인 탐미주의자였던 J.K. 위즈망(J.K. Huysmans)이 쓴 동명의 책(1884년 출간)에서 발췌한 텍스트 일부를 컴퓨터에 연결시켜 모스 부호로 바꾼 후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인 리비오 카스틸리오니와 잔프란코 프라티니가 디자인한 투명 플라스틱 튜브 모양의 조명 명품 보알룸 램프(Boalum Lamp, 아르테미데 사 생산, 1969)를 달아 깜빡거리도록 제작한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론가 얀 페르뵈르트(Jan Verwoert)의 분석은 다분히 민주적이다. 그에 따르면 위즈망의 탐미주의 텍스트와 보알룸 명품 램프로 대변되는 고급문화와 컴퓨터로 대변되는 민주적인 기계를 한 작품 안에 나란히 연결하여 추상적인 관념을 컴퓨터라는 민주적 매체로 전환시킨 윈 에반스는 이렇게 ‘번역된’ 메시지(주로 모스 신호 음향효과나 음악)를 관객과 소통하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모스 부호는 근 한 세기 전에 사용된 한물간 통신언어라는 점에서 과거, 기억, 구물(舊物)에 대한 노스탤지아의 은유이며 컴퓨터는 대중 매체의 상징에 불과하다. 조명에 모스 부호라는 특수 문자/소리 언어와 컴퓨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언뜻 윈 에반스는 테크노 지향적인 미술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지만 실은 테크놀러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또 그는 작품 제작을 디자이너들이나 전문 기술자들에게 외주하는 대리 제작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 디자이너들을 시켜 디자인한 후 무라노 유리 공방에서 제작해 온 샹들리에를 작품화한 〈주파주 교정과 센시토메트리(Calibration and Sensitometry)〉(1987/2006)와 〈일기: 세상을 개선하는 방법(Diary: How to Improve the World(You will only make is worse)〉(2003)은 존 케이지의 글 〈M. Writings ’76〜’72〉에서 발췌한 텍스트를 컴퓨터를 사용해 모스 코드로 전환한 후 빛이 모스 신호를 치듯 깜빡거리도록 만든 조명설치 연작들이다.
윈 에반스의 궁극적인 관심사이자 영원한 영감의 원천은 텍스트다. 언어와 시간과 지각의 현상학이라는 주제를 일관적으로 다루게 되기까지 그는 어린시절부터 알랭 로브-그리예의 누보로망 텍스트와 문예이론을 흠모하며 통독했다고 한다. 누보로망 소설은 서부 웨일스의 석탄과 철강산업 도시 라넬리에서 자란 감수성 예민한 유년의 윈 에반스에게 환상의 날개를 달아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시간, 장소, 인물 성격의 묘사를 위주로 한 전통적인 소설과는 반대로 화자의 개인적인 시점을 위주로 한 한결 모호한 분위기의 누벨 로망식 서술법은 ‘열린 결말’과 ‘자유로운 상상’을 허용했다.
그렇다면 세리스 윈 에반스에게 이미지는 무엇을 뜻할까? 그에게 이미지로 완성되는 시각 미술 작업이란 이야기의 종결을 뜻하며 따라서 곧 임박할 사멸에 대한 은유이다. 윈 에반스가 알랭 로브-그리예와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현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공동 관장)와 나눈 3자 대담에서 밝힌 바 있듯이, 이미지 또는 그림(영상 혹은 비영상)은 ‘결말의 종결’을 뜻하며 이는 곧 그것이 해피엔딩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독자의 ‘실망’을 뜻한다. 롤랑 바르트가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글에서도 썼듯이 결말의 종결이라 함은 이야기가 종착지에 다다르고 여러 무한한 상상의 결론이 모조리 닫힘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윈 에반스가 기호학에서 빌려온 텍스트 상호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 개념을 일관된 화두로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의 하늘은 종이처럼 얇다(The Sky is thin as Paper here)〉(2004)는 윌리엄 버로스의 소설 〈The Place of Dead Roads〉에 등장하는 구절을 따와 제목을 붙이고 일본 신사(神社) 예식에서 따온 이미지들을 슬라이드 프로젝션으로 만들었다. 겹겹이 겹쳐져 보이는 일본 남성들의 사진 이미지들을 통해서 작가는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hypertext)를 연상시키는 내러티브를 재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가 하면 〈드리머신(Dreamachine)〉 시리즈는 시인 겸 화가이자 버로스의 반려자였던 브라이언 가이즌에 대한 경의를 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이즌이 1960년대에 만들었던 드리머신을 재구성한 이 작품은 서서히 도는 긴 원통에 새겨진 패턴 사이사이로 은은한 전구 빛이 스며나오도록 제작되었다. 한참 바라보고 있자면 관객은 어느덧 최면 상태에 빠지는 듯한 묘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1960년대 풍의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와 가이즌의 위대한 문학정신이 남기고 간 마력의 기억을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만물의 덧없음을 빛으로 읊조리는 음유시인
덧없음(ephemerality)과 이율배반(paradox)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그의 대표작 〈Inverse, Reverse, Perverse〉(1996)에 잘 나타나 있다. 자크 라캉의 ‘거울 자아 단계’ 이론을 재연한 듯한 이 작품에서 관객은 표면이 오목하게 들어간 요면 거울 속에 반영된 위아래가 뒤집히고 형상이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작가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시각적 인지(perception)가 얼마나 망가지기 쉽고 상대적인 것인지를 생각해보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뫼비우스 띠〉(1997)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연속과 반복의 수학적인 형태를 빌려서 인간의 감성은 기억 혹은 추억에 의해서 끝없이 반복되고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한 번 터지면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불꽃은 윈 에반스가 즐겨 사용하는 또다른 덧없음의 은유다. 〈In Girum Imus Nocte Et Consumimur Igni〉(1997)는 기 드보르의 최후작인 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온 제목으로서 “우리는 밤새 돌고 돌다가 불 속으로 탕진해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돌고 도는 생과 사의 순환원리를 명상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앞에서부터 읽든 뒤에서부터 읽든 동일한 라틴어 팔린드롬(palindrome)의 언어적 유희성을 십분 활용하기 위하여 플라스틱 원통형 위에 네온관으로 문구를 부착시켰다.
영화 선배인 데릭 저먼의 영향 덕택에 세리스 윈 에반스의 설치작은 빛을 흥건하게 사용한 것들이 대종을 이룬다. 네온 조명은 초고속으로 대기를 여행하는 빛의 특성을 반영해주는 안성맞춤의 재료일 뿐만 아니라 현대인에게 익숙한 24시간 잠들지 않는 도시 공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네온 조명으로 빛나는 텍스트 구절은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언급을 하는 듯 보이지만 작가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나 해석의 여지를 노출시키기를 꺼린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깜빡대는 네온 빛과 모호함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언뜻 아름다워 보이는 그의 작품에는 어김없이 세상만사의 일시성과 덧없음에 대한 멜랑콜리가 감돈다. 최근 오스트리아 쿤스트하우스 그라츠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거품 방울을 파는 행상인(Bubble Peddler)〉이라고 이름한 연유도 전세계를 여행하며 미술 작품을 선보이고 내다 파는 작가 자신을 한낱 비누거품을 방울방울 불어서 생계를 잇는 행상인에 비유한 시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품방울은 갖가지 형상으로 오색찬연하게 공중을 날지만 순식간에 터져 사라지고 만다. 일본의 가부키에서 기요모토(淸元) 음악에 맞춰 추는 격렬한 춤에서 빌린 거품방울을 파는 행상인 모티프는 한낱 덧없는 존재의 무상함을 뜻한다.
대중 매체가 현대인의 가장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구석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요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경계는 점점 자취를 잃고 있다. 그에 대한 논평으로 윈 에반스는 이번 그라츠의 전시를 위해 특수 주문 제작된 작품 〈채색된 중국 전등(Coloured Chinese Lanterns...)〉(2007)에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이 무작위로 뒤섞인 현실을 조용히 꼬집는다.
제아무리 희한하고 별의별 모양의 거품을 불어낸다 한들, 거품방울의 생명은 몇 초를 넘기지 못하고 터져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듯이 글로벌시대의 미술계를 주름잡으며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작가 자신이 그것과 뭐가 다르다 하겠는가? 세리스 윈 에반스는 깨지기 쉬운 생명과 마찬가지로 세속의 모든 성공과 명망조차 무상(無常)한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 wolganmis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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