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22, 2009

연기와 통섭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과 통섭(統攝)

동국대 사학과 김상현 교수 특별기고



“진리는 非一非異…모든 학문은 하나로 통한다”


붓다, 그 분이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의 도리’였다. 신라의 의상도 말했다. “연기라는 한 마디 말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諸法]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거대한 은하계거나 혹은 미세한 먼지일지라도. 이를 화엄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한다. 우주는 서로 의존하고 있는 총체적 세계, 거대한 그물처럼 얽혀서 서로 영향을 준다. 샹들리에 구슬들이 서로 비추듯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무수히 분리된 개체로 구성된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조화를 이루는, 그러기에 나눌 수 없는 전체로 역동적인 관계의 거물이다. 그래서 의상은 “전체라는 하나 속에 일체의 다양한 것들이 있고, 많은 개별 중에 전체라는 하나가 있다.[一中一切多中一] 하나의 극히 작은 먼지 속에 거대한 시방세계 우주가 포함되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했다. 이상에 의하면, 전체와 부분은 즉(卽)과 중(中)의 관계로 설명된다.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그리고 전체 중에 하나가 있다.


물리학자 프리조프 카프라는 전체와 부분에 대해서 설명한다. “모든 개체는 통합된 시스템이라는 뜻에서는 전체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 복잡성이 더 높은 수준의 전체에 대해서는 부분이 된다. 사실, 절대적 의미에서는 부분과 전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전체이면서 부분인 아(兒)조직체를 ‘홀론(holon)’이라고 부른다.”


‘하나’라는 우리말은 마치 ‘홀론’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전체의 의미로 쓰일 경우도 있고, 부분의 의미로 쓰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다[一中一切]’고 할 때의 하나는 전체를 의미하지만, ‘백 명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경우의 하나는 부분을 의미하듯이. 전체와 그것을 이룩하는 부분은 다 같이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물질세계 전체를 상호 연결된 관계의 역동적 거물로 보는 현대 물리학의 이론은 불교의 연기론과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 학계에 대두한 ‘통섭(統攝)’이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인 양 화두가 되고 있다. 조금은 낯설기도 한 통섭이라는 이 단어는 영어 ‘consilience’의 번역어다. 최재천 교수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1929~)의 저서 (1998) 를 번역하여 <통섭>(2005)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하면서부터 통섭은 ‘지식의 대통합’으로 풀이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아우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번역한 최 교수는, 21세기에 들어서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통합의 바람이 불고 있고, 이러한 변화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 이가 에드워드 휠슨이라고 말한다.


세계를 개별적인 부분들로 분리해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현대 서구문명의 기저(基底)를 이루어 왔던 점을 감안할 때, ‘지식의 대통합’을 선창(先唱)하고 있는 그의 노력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근대화 이후 서양의 학문 방법에 크게 영향 받고 있는 우리의 학계 또한 세분화됨으로써 전체를 아우르는 큰 안목을 잃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일관된 이론의 실로 모두를 꿰는 범학문적 접근을 할 때가 되었다고 외치는 최 교수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이 제가끔 자기 영역의 목소리만 전체에 보태는 다학문적(多學文的)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학제적 연구의 벽을 넘어 ‘모든 학문을 꿸 수 있는 이론의 실’이 있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윌슨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세상에는 다수의 진리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 하나의 기본 진리만이 존재하는가?” 최 교수 또한 “통섭의 노력은 모든 것을 꿰뚫는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이라고 한다. 이들의 표현에는 희미하지만 어떤 ‘유일한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혹은 그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은 필자의 오독 탓일까?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곧 ‘비일비이(非一非異)’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진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문은 많고, 그 문으로 향한 길도 많다. 그래서 원효(617~686)는 <기신론소>에서 “법문(法門)은 한량없어서 오직 한 길만이 아니다. 이 때문에 곳을 따라 시설해서 모두 도리가 있다”고 했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원효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능히 모든 방면이 다 합당하고, 다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방면이 한 맛으로 통한다(由非一故能當諸門 非異故 由諸門一味)”고 했던 것이다. 다양성의 인정, 그것은 본래 불교의 기본 입장인 동시에 원효 화쟁논리의 한 전제이기도 하다. 통섭의 전도사격인 최 교수에 의하면, 화엄사상에 대한 원효의 해설에 통섭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필자는 아직 원효의 저서에서 통섭이란 단어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최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통섭이 원효의 사상과 통하는 바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원효는 통합과 더불어 전개를 동시에 강조했다. 그의 화쟁 방법에는 전개와 통합이 자유로워, 총체적으로 말하거나 개별적으로 논하는 방법을 자유롭게 구사하곤 했다. 원효가 즐겨했던 통합과 전개의 방법에 주목하여, “원효의 진리 탐구 방법은 개합(開合)의 논리로서 철두철미 일관되어 있다”고 지적한 이도 있다. 이 때문에 ‘통섭은 분석과 종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는 최 교수의 설명은 원효의 개합논리와 매우 닮아 있다.


원효는 어떤 경우에도 ‘산을 보지 못한 채 골짜기에서 헤매거나 나무를 버리고 숲 속으로 달려가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종요(宗要)를 “통합해서 논하면 일관(一觀)이요, 열어서 말한다면 열개의 문이다(合論一觀開說十門)”라고 했다. 숲을 보는 통합적인 안목도 필요하고 나무를 보는 분석적인 논의 또한 중요한 것임을 원효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통합이나 전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웠다.


그는 말했다. “전개한다고 번거로워지는 것도 아니요, 합친다고 좁아지는 것도 아니다.(開而不繁 合而不狹) 또한 전개한다고 하나를 더 보태는 것도 아니고, 합친다고 해서 열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開不增一 合不減十) 이것이 통합과 전개의 묘술(妙術)이다.”


각각의 홀론은 더 큰 전체의 부분으로서 통합하려는 경향과 개성을 유지하려는 자기 주장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점에 주목했던 카프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개체의 가치를 유지해야 하며, 동시에 더 큰 시스템 속으로 그 자신을 조화 있게 통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개체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부분으로 조화롭게 통합시킬 수 있다면, 이 또한 묘술이다. 분석과 통합을 동시에 포괄하는 것이 통섭이라면, 이것 역시 묘술이다. 최 교수에 의하면, 뿌리와 가지를 연결하는 줄기가 통섭의 현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통섭은 줄기뿐만 아니라, 가지나 뿌리에서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학문의 경계를 엄격하게 지킬 필요야 없겠지만, 여전히 전공은 필요한 것이고,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안목은 가져야 하겠지만, 정밀한 분석적 사고 또한 필요한 것이다. 지식의 통합이나 학문의 울타리를 허무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들 일상적인 사고나 삶의 현장에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용어는 없을까?


문(門)에는 개폐(開閉)와 출입(出入)의 의미가 있다는 원효의 설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을 여닫으며 자유롭게 드나들듯 학문도 지식도, 일상의 상식도 막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출처 | 파라미타 선원

Wednesday, August 19, 2009

存在, 不在 그리고 無 혹은 空

statement를 정리하다 '나무는 나무이면서 존재와 같다.'는 나의 동어반복을 dk가 실랄하게 지적했다.
부랴부랴 存在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주변에 철학하는 사람, 미학하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요즘은 공학박사들과 함께 하다보니, 주변에서 쉽게 질문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가까이 서용선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을 떠올리고 전화를 드렸다.

존재는 돌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자생하거나 변화하는 것만 한정하지 않는다는것.
존재 아닌 것은 無나 空이며
존재와 반대되는 것은 부재라는 대답을 듣게된다.

삶과 죽음은
존재와 부재
결국 공인가!

Tuesday, August 18, 2009

삶과 죽음은 하나인가?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있다.

만약 나의 죽음에 대해 현재 지금에 직면했다면 안타까움은 단 하나!

아이들을 다 돌보지 못했다는 것 뿐이다.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했다.

시작도 못했으니,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 참 적나라하게 현재의 내 모습이 나오는 구나.

변한 것이 없다.

나의 괴로움은 쉽게 변하지 않는 자신에게 있다.
철저함이 없다.
어쩌면 지난 몇년의 시간들 가장 고통속에 있었던 그 시간들의 나는 진정 내모습이 아닌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 몇년보다 오랫동안 지배해온 모습은 느슨한 삶의 모습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든다.


또한 현명하지 못한 것도 내 모습이다.
존중하고 싶지 않을때는 존중하지 않는다

존중 받고 싶으면 존중 받을 행동을 하자는 생각이 행동으로
치받는 내가 참 어리석으면서도 나의 현재의 한계이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은지도 모른다.

Monday, August 17, 2009

한 번 정한 원칙은 확실히 지켰다.

공부하라 대신 공부하자 하니 6남매 하버드·예일 가더라"
[중앙일보 2009-08-18 00:29]


전혜성 박사 가족들 박사학위 합치면 11개


[중앙일보 전수진] 재미동포 전혜성(80) 박사는 ‘6남매를 모두 하버드대·예일대에 보낸 어머니’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에서 장남 고경주(57·미국명 하워드 고)씨가 보건부 차관보로, 삼남 고홍주(54·미국명 해롤드 고)씨가 국무부 법률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달 말엔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이 이들을 ‘워싱턴DC를 강타한 한인 2세 파워 엘리트 형제’로 소개하면서 전 박사의 자녀교육 노하우가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자녀 교육법을 정리한 저서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중앙북스)를 팔순 기념으로 펴냈다. 그런 전 박사와 전화 인터뷰를 하며 교육관을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6남매는 물론 11명의 손자까지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대에 보냈습니다. 어떤 교육철학으로 자녀를 길렀습니까.

“저는 엘리트가 되는 것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철학은 확고합니다.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덕망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고 이를 자녀들에게 강조해 왔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에게 충고를 하신다면.

“아이의 관심사나 재능과는 무관하게 어떻게든 내 아이가 하버드나 예일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많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아이가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 집착으로 변해선 안 됩니다. 한국의 아이비리그 집착증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하버드나 예일만 좋은 학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 아이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하버드는 가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어요. 하버드의 학풍이 아이의 성격과는 잘 맞지 않을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한국 학생이 외국에 유학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충고를 한다면.

“미국의 학교 관계자들이 한국 학생 문제로 제게 상담을 많이 해오고 있습니다. 솔직히 걱정입니다. 중퇴를 하는 등 문제가 늘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런 문제의 대부분은 유학생의 가족환경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아이들의 유학을 위해 부모가 떨어져 생활하는 게 문제인 것이지요. 멀쩡한 가정을 두고 아이 교육을 위해 부부가 떨어져 생활하다 보면 부모는 ‘내가 이렇게 희생하는데 아이가 당연히 잘해야지’라는 집착을 갖게 되지요. 아이는 죄의식에 가까운 부담감을 지게 되고요. 결국 부모에게나 아이에게나 부정적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면 전 박사는 어떻게 했나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적극 활용했어요. 남편과 함께 역할을 적절히 분담했습니다. 부모 중 어느 한쪽에 자녀교육의 부담이 치우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작지만 확고한 원칙을 세우며 가정을 운영했습니다. 아침 식사는 반드시 가족이 함께했고, 정기적으로 가족회의를 열어 집안의 대소사를 아이들과 함께 의논하고 결정했습니다. 한 번 정한 원칙은 확실히 지켰습니다. 가족회의에선 아이들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아이들이 발언할 때 저희 부부가 끼어들라치면 아이들로부터 ‘지금은 말씀하실 차례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듣곤 했지요.”

-아이들을 상하가 아닌 수평 관계로 대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가정을 꾸려가는 파트너입니다.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 무조건 희생을 하는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저는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아이들끼리 어울리며 자연스레 민주주의와 리더십을 기르게 되기 때문이지요.”

-자녀들에게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공부에 몰두하게 됐나요.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 대신 ‘공부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집안 어딜 가나 책상이 있었고 저와 남편이 먼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지요.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자신의 일을 묵묵히 열심히 하면 아이들도 결국 따라갑니다. 부모 스스로 자신들의 인생에 대한 명확한 목표를 갖고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해요.”

-팔순을 맞으셨는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남편 고(故) 고광림 박사와 함께 설립한 동암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을 세계에 알릴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을 잘 이해하는 것이 제 필생의 목표입니다. 지난달 팔순 잔치 때 미국인과 한국인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제자들이 사물놀이를 선보이고 한복 차림으로 한국 노래를 불러줘서 아주 흐뭇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얼마 전 히스패닉계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법관 자리에 오른 소니아 소토마요르의 취임식을 보며 많은 걸 느꼈습니다. 앞으로 한국계 미국인도 그렇게 진출해 나가야 하니까요. 저와 아이들이 그 초석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 아이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 함께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수진 기자

Saturday, August 15, 2009

Trees in the sky

For Digital Bauhaus

[fn 이사람]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참가 게르프리트 슈토커
2009-08-14 18:47:01


“아르스 일렉트로니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시 자체보다는 예술가와 과학자의 창조적인 사고를 지원한 덕분입니다. 1979년 출범한 이후 구조나 내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의 추구’라는 지향점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미디어아트축제가 될 수 있었지요.”

올해 30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미디어아트축제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예술감독 게르프리트 슈토커(45·사진). 인천 송도에서 열리고 있는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참가차 최근 방한한 그는 “첨단 콘텐츠 중심도시를 지향하는 인천 송도가 현대의 중대한 사회문제를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다루기 위한 관문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슈토커는 지난 1995년부터 아르스일렉트로니카의 예술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축제가 열리는 오스트리아의 린츠는 예술과 사회와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보여주는 원형이자 예술과 문화활동이 한 도시의 정체성이나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보여주는 전범이다.

그는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창발적 실재에 대한 예술적이며 과학적인 탐색을 대중의 영역 내에서 추구합니다. 그 결과 인구 20만의 소도시에 불과한 린츠는 단지 상업적이거나 산업적인 도시가 아니라 문화적인 과업을 갖는 전형적인 도시로 변모했습니다”고 말한다.



사실 린츠는 거대한 제국주의 시대의 문화가 살아있는 빈과 모차르트와 같은 고전음악의 전통을 지닌 잘츠부르크 사이에 낀 ‘보잘 것 없는’ 소도시였다. 그나마 철강 공업도시로 연명해 왔으나 70년대 말과 80년대 철강 산업이 불황에 허덕이면서 빈사상태에 빠졌다. 이때 린츠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대신 미래를 향해 의미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는데, 이게 세계적인 미디어아트축제의 시작이다.

슈토커는 “처음엔 예술가와 과학자가 만나 다양한 분야의 학제간 연구의 토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매년 중요한 신기술과 과학적 혁신을 다루는 구체적인 주제가 설정되면서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예술과 기술 그리고 사회현상을 탐색하는 축제로 성장한 것입니다”고 회고한다.

인구 20만명의 소도시인 린츠에 소리와 빛, 레이저를 이용한 공연 ‘소리의 구름(Cloud of Sound)’을 보기 위해 10만명의 관중이 모인다고 한다. 제1회 미디어아트페스티벌로 첫발을 내디딘 인천 송도도 과연 그러한 축제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noja@fnnews.com 노정용기자